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다안의 침입 (문단 편집) === 치악성 전투 : 원충갑의 맹활약 === [[파일:WZfX7TG.gif]] 이때 고려의 각 고을에서는 카다안의 군대가 이르렀다는 소문만 들려도 모두 달아나는 판국이라 이를 저지하려는 병사조차 없었다. 카다안은 이 무렵에 현 [[강원도]] [[원주시]]인 원주(原州)에 머물며 여기저기 노략질을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보급하려 했다. 게중에 기병 50여명 가량은 현재의 [[치악산]]에 있었던 치악성(雉岳城) 아래까지 와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였던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이끌고 이를 공격해서 기병 50여명을 쫓아내고는 이를 추격하여 말 8필을 탈환했다.''' 이어 얼마 뒤 도라도(都刺闍), 토에나(禿於乃), 보랄(孛蘭)이라는 이름의 카다안군 장수들이 4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시 와 병사들의 녹봉으로 주려고 모아두었던 양식을 탈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원충갑은 중산(仲山)이라는 사람을 포함한 7명과 함께 나와서 기회를 엿보다가, '''갑자기 7명으로 기습을 가하여 400여 명을 격퇴해버렸다.''' 심지어 어찌나 놀랐는지 적들은 말을 25필이나 남겨둔 채 달아났다고 한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는 이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적이 버리고 간 말들을 모두 맹활약한 용장 원충갑에게 주었다. 그러자 적들은 또다시 몰려와 성을 포위하고,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는데 원충갑은 항복 편지를 전달한 사람의 목을 벤 다음 여기에 항복 편지를 묶어 성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카다안군은 분개하여 공성 장비들을 보수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치악성 내부는 [[충격과 공포]]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카다안군은 일전에 양근성에서 사로잡았던 부녀자 2명을 성안으로 보내 항복을 권하게 했다. 그러자 원충갑은 그 여자들을 참수하고는 그 수급을 밖으로 던져 적을 도발했고, 이에 적은 북을 치며 사방에서 성을 공격해 치악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은 '''갑자기 성 밖으로 나가 싸웠고,''' 그 틈에 원충갑은 말을 달려 나가 적병을 한 명 베니 적군의 기세가 갑자기 줄었다고 한다. 여기에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등 30명의 결사대가 원충갑을 도와 싸우는 가운데 원주의 주리(州吏) 원현(元玄), 부행란(傅行蘭), 원종수(元鍾秀)가 국학생(國學生) 안수정(安守貞) 등 100여명을 이끌고 서쪽 봉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결사대를 도와 싸움은 혼전 양상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먼저 성 밖을 나섰던 조신이 직접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했는데, '''화살이 오른 팔목에 맞았으나 그 상태로 계속 북을 쳐 북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우자 카다안군의 선봉도 기가 질려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또 그것이 연쇄적인 효과를 일으켜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카다안군은]] 자기들끼리 엉켜 밟아대면서 난장판이 되고 말았고, 그틈을 타 원주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적들을 공격했다. 함성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가운데 이런 난전이 10번이나 이어졌고, 적장 도라도는 살해당했으며, 카다안군의 절반 가량이 활에 맞아 죽었다. 이는 카다안군의 기세를 꺾는 효과를 가져왔고, 고려군 전체의 사기 진작에도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런 큰 역할을 담당한 원충갑은 '''대번에 6번이나 승진해''' 삼사우윤(三司右尹)이라는 관직에까지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